일본 경제 변화 움직임
일본의 저온 경제 탈출, 가능할까
지난 30년간 물가와 임금이 얼어붙은 일본에서는 사람도, 물건도, 돈도 축소균형으로 수렴되어 왔다. 버블이 붕괴한 이후 기업들은 고객 이탈을 우려해 비용을 절감하는 방식으로 가격 인상을 회피했고, 소비자들은 기업들 이 가격을 올리지 않는 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가격을 인상하지 못한 기업들은 임금도 올리지 않았다. 기업의 인건비는 지난 30년간 거의 200조엔 안팎으로 제자리걸음을 했다. 물가와 임금이 움직이지 않는 ‘저온 경제’는 지난 30년간 일본 사회에 뿌리내린 규범이었다.
1. 평범한 경제로 돌아가는 일본
그랬던 일본에서 최근 물가와 임금이 오르는 ‘평범한 경제’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일본은행이 목표로 내건 소비자물가 상승률 2%는 이미 2022년 4월(2.1%)에 달성됐고, 2023년 1월에는 상승률이 두 배(4.2%)로 뛰어올랐다.
일본에서 4%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관찰된 것은 무려 41년 4개월 만이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 역시 2.9%로 상승 기세가 약간 꺾이기는 했지만, 일본은행의 물가 목표는 19개월 연속 초과 달성되었다.
하나둘 가격 인상에 나선 기업들은 정체된 임금구조도 손보기 시작했다. 2023년 춘투의 임금 인상률은 3.6%로 3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기시다 총리가 역점을 둔 최저임금 역시 4.5%나 상승하면서 처음으로 천 엔을 넘어섰다.
다만 물가를 고려한 1인당 실질임금 상승률은 여전히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30년 만의 높은 임금 인상률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30년 만에 높은 인플레이션율이 임금 상승률을 능가하는 바람에 실질임금 상승률은 마이너스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행이 고민하는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비용이 아닌 임금과 수요가 견인하는 인플레이션이 확실히 정착된다면,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고 수익률곡선제어(YCC)도 폐지할 것이다.
일본은행이 정책 목표로 제시한 소비자물가 상승률 2%는 이미 달성됐고, GDP디플레이터, 단위당 노동비용, GDP갭 어느 것을 보더라도 디플레이션 탈출을 선언할 수 있는 환경은 충분히 무르익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일본은행이 당장이라도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끝내고 금리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일본은행은 ‘평범한 경제’로 돌아가는 시기에 대해 숙고를 거듭하고 있다.
2. 일본은행의 고민을 보여주는 YCC 조정
최근 1년 사이에 발표된 세 차례의 YCC 조정을 보면 일본은행이 ‘평범한 경제’로 돌아가는 시점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2022년 12월에 발표된 ‘YCC 변동폭 수정’이었다. 일본은행은 ‘시장기능 저하와 금융환경에 미칠 악영향’을 막기 위해 장기금리의 변동 허용범위를 기존의 ±0.25%에서 ‘±0.5% 테이도(程度)’로 확대하였다.
2022 년 9~10월에 걸쳐 일본 금융당국은 9.2조엔을 쏟아 부으면서 심리적 저항선 인 1달러 150엔을 필사적으로 지켜냈는데, 미일 금리차로 인한 슈퍼엔저는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일본 국민의 생활고를 가중시켰고, 이는 기시다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일본은행은 엔저 추세를 꺾기 위해 YCC 변동폭을 0.25%에서 0.5%로 끌어올려 사실상의 금리 인상을 용인하였다.
그러나 미일 금리차로 인한 슈퍼엔저 상황과 이로 인한 물가상승 그리고 금리 상승의 압력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그 결과, 2023년 7월 두 번째 YCC 조정이 발표되었다. ‘YCC 운용의 유연화’라고 불리는 두 번째 조정의 핵심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YCC 변동폭을 ‘±0.5%테이도(程度)’에 서 ‘±0.5%메도(目途)’로 바꾸고, 두 번째는 지정가 오퍼레이션 목표를 0.5% 에서 1.0%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여기서 테이도(程度)와 메도(目途)는 둘 다 목표를 뜻하는 말이지만, 일본은행은 테이도(程度)를 좀 더 엄격한 목표 로, 메도(目途)는 좀 더 유연한 목표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즉, ‘±0.5%테이도(程度)’는 장기금리가 0.5%를 넘지 않도록 지정가 오퍼레이션(무제한 국채매입)을 실시하겠다는 뜻이고, ‘±0.5%메도(目途)’는 장기금리가 0.5% 를 넘어가도 대응하지 않고 지켜보다가, 1.0%에 도달하면 지정가 오퍼레이션을 실시하겠다는 뜻이다.
세 번째 YCC조정은 2023년 10월에 발표한 ‘YCC 재유연화’이다. 이 조정의 핵심적인 내용은 YCC 변동폭을 ‘±0.5%메도’에서 ‘±1.0%메도’(目 途)로 변경하고, 지정가 오퍼레이션은 상황에 맞게 실시하겠다는 것인데, 해석하면 장기금리 조절목표를 사실상 1.0%로 정하고, 장기금리가 그 이상 상승하더라도 지정가 오퍼레이션을 당장에 실시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며 유연하게 대처하겠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11월 말 현재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0.7~0.8% 정도에서 움직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일본은행 의 목표 범위에서 장기금리가 조절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결단 시점, 2024년 춘투 이후 주목
세 차례 YCC 조정은 일반인은 물론 전문가들도 정확히 그 의도를 파악하 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단순히 생각하면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고 YCC 를 철폐하면 될 일인데, 일본은행은 미세 조정을 통해 사실상 장기금리의 조절목표를 0%에서 1%로 끌어올렸다.
이렇듯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시장이 이를 본격적인 금리 인상의 신호로 받아들일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에다 일본은행 총재는 마이너스 금리 해제와 YCC철폐 시기에 대해 ‘결단이 늦어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보다 섣부른 결단이 가져오는 부작용이 훨씬 크다’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여기서 ‘결단이 늦어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은 인플레이션이며, ‘섣부른 결단이 가져오는 부작용’은 경기침체와 실업이다.
일본은 지금 30년 불황터널 탈출의 마지막 구간에 들어섰다. 과거 섣부른 금리 인상으로 회생의 기회를 날려버린 기억이 있는 일본은행은 ‘금리 없는 세상’에서 ‘금리 있는 세상’으로의 신중한 이행을 추구하고 있다. 관건은 역시 임금인상이다.
실질임금이 회복되어야 소비가 살아나면서 경기침체에 빠지지 않고 금리가 있는 ‘평범한 경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행은 2024년 봄을 주시하고 있다. 만약 2024 춘투에서 올해에 버금가는 임금인상이 단행된다면, 일본은행은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멈추고 드디어 ‘저온경제’ 탈출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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