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미스터리
환율의 상대적 가치
최근 우리나라의 펀더멘탈은 양호하다. 경상수지는 작년 2/4분기부터 흑자 폭이 확대 되고 있으며, 상반기 경상수지(377억 달러)도 지난해 같은 기간(11.5억 달러)보다 크게 늘었다.
이와 더불어 국제 해양 물동량 등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실질경제활동 지수도 2023년 2월을 저점으로 반등 중이다. 작년 10월 이후 대체로 플러스(+) 값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은 양호한 글로벌 교역 환경을 반영한다.
펀더멘탈이 양호하면 일반적으로 통화가치는 절상된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무역 실적과 교역 환경을 펀더멘탈로 볼 수 있다. 경상수지 흑자와 글로벌 교역 개선은 원화 강세 요인이다.
그러나 펀더멘털 개선에도 원화는 오히려 약세 압력이 높아지고 있다. 펀더멘탈만으로 원화 가치를 설명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해부터 원화 약세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결국 국내 성장과 통화 간 연결고리가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펀더멘털 이외에 환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늘었다는 의미이다. 핵심은 성장과 금리의 상대적인 격차와 자본 거래의 증가라고 생각한다.
1. 미국의 강한 성장과 금리
펀더멘털 회복에도 원화가 약한 이유는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성장이 약하고, 금리도 낮기 때문이라고 본다. 지난 분기 경제성장률과 기준금리 모두 한국이 미국보다 낮다(성장률과 기준금리 격차 각각 -0.8%p, -2.0%p).
2000년대 들어 6개월 넘게 한국이 미국보다 성장도 약하고 금리도 낮았던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처럼 미국 대비 성장이 약하고 금리가 낮으면, 우리나라의 펀더멘털이 절대적으로 회복돼도 원화 강세로 이어지기가 어렵다.
경상수지 흑자로 달러를 벌어들이지만, 상당부분이 성장이 양호하고 금리도 높은 미국으로 다시 흘러나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파는 상품의 질이 개선됐어도 다른 가게의 상품이 더 매력있다면, 사람들은 그 가게를 찾을 것이다
과거 사례를 봐도 원/달러 환율 하락(=원화 강세) 시기에는 ① 미국보다 성장이 강하거나 ② 금리가 높았다. 2005~07년에는 한국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낮았지만 성장이 상대적으로 양호했고, 원/달러 환율은 하락했다.
2013~15년에는 양국 성장 차이가 크지 않았지만 한국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았고, 원/달러 환율은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2. 성장이 약하고 금리가 낮을 때 원화 약세
성장이 약하고 금리가 낮을 때 자국 통화 강세가 제한되는 건 주요국들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유사하게 제조업 비중이 크고 대외의존도가 어느정도 높은 일본, 독일, 영국 사례를 살펴봤다.
일본도 저성장, 저금리 국면에서는 엔화가 쉽게 강세로 가지 못했다. 1990년대 일본은 2010년대 한국과 유사하게 성장이 약했고 금리가 낮았다.
1995~96년 경기가 반등하기도 했으나 자산시장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결국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다. 이 때 이후로 엔/달러 환율은 오랜 기간 100엔을 하회하지 못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성장이 양호하고 금리 차가 줄어들 때는 엔화 강세 압력이 높아졌다. 침체 국면 이후 처음으로 엔/달러 환율이 100엔을 하회한 시기는 2008년 말이다.
2000 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일본은 미국 대비 성장이 약하고 금리가 낮았다. 그러나 엔화가 가장 강했을 때만큼은 미국보다 성장률이 높고 금리 차이도 거의 없었다.
일본 사례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성장과 금리 중에서 최소 한 가지 이상은 미국보다 강해야 자국 통화 강세가 나타날 수 있다. 월초 급격한 엔화 강세의 기저에도 미-일 금 리 격차 축소 전망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성장보다 금리 차이가 변수일 것으로 보여 엔화는 앞으로도 미국과의 통화정책 격차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과 엔화의 향방 (purplemarie.com)
유로화도 유로존 경기 부진과 낮은 금리가 겹쳐질 때는 약했다. 독일을 기준으로 보면, 과거에도 미국보다 성장이 약하고 금리가 낮은 상황이 두 차례 더 있었다. 상대적으로 성장이 약했던 2005~06년에는 유로화가 약세로 돌아섰고, 금리에 이어 성장률도 역전 됐던 2018~19에도 유로화는 약세 전환했다.
2022년 이후를 포함해 과거 두 차례 시기의 공통점은 유로화가 강세로 가진 않았다는 것이다. 2002년이나 2016년 이후 유로화 강세 시기에는 미국 대비 성장이 양호했거나, 금리가 높았다. 유로화 움직임도 원화와 기본 메커니즘이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영국 파운드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 2018~19년에 영국 성장이 상대적으로 약해지고 금리가 역전됐을 때, 파운드화는 약세 전환됐다. 다만, 파운드화는 성장보다 금리 차이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
이를 토대로 하면 파운드화는 강세로 갈 가능성이 높다. 영국은 다른 주요국과는 달리 미국과 금리 수준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연준이 영란은행보다 금리를 빠르게 인하할 경우, 영-미 금리 역전은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해소될 수 있다. 영국 금리가 높아지면 파운드화 강세 압력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3. 낮아진 펀더멘털의 환율 설명력
경상수지, 글로벌 교역 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펀더멘털의 환율 설명력이 낮아진 또 다른 요인은 돈의 거래(금융계정)가 급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상품수지, 서비스수지 등으로 구성된 경상수지가 외국과 실물을 거래한 결과라면, 증권투자와 직접투자 등을 포함하는 금융계정은 돈의 거래를 의미한다.
2000년대 들어 상품교역 규모는 약 4~5배 가량 늘어났지만, 금융계정 내 자산(=해외투자)은 주식을 중심으로 최대 20배까지 증가했다.
금융계정 규모가 확대되면서 환율에 미치는 영향도 커졌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수출/입을 비롯한 실물거래 관련 달러화의 수요와 공급이 외환시장 흐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면, 최근에는 자산을 사고 팔기 위한 돈거래 비중이 빠르게 늘면서 경상수지만으로 환율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앞으로 금융계정의 영향력이 줄어들 가능성은 낮다. 더욱 유연하고 개방적인 외환시장 정책, 글로벌 금융거래 증가, 금융상품 다양화 흐름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도 외환시장 규제 완화와 시장 접근성 개선을 위한 조치들을 내놓고 있다. 자본 이동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은 유지될 전망이다
2010년 이후 우리나라의 달러화 표시 금융자산은 연평균 14.0% 늘었고, 특히 주식과 펀드 투자는 연평균 22.5% 증가했다. 같은 기간 달러화 표시 금융부채의 연평균 증가율은 3.2%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달러화 수요가 공급보다 더 가파르게 늘었다는 의미로 이는 원화 약세 요인으로 볼 수 있다.
4. 환율 전망
결국 원화가 추세적으로 강세로 돌아서려면 미국보다 성장이 강해지거나 금리가 높아 져야 하는데, 단기간 내 한-미 금리 역전이 정상화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미국 기준금리가 한국보다 2%p 높은데, 연준의 200bp 인하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데다, 그 동안 한국은행이 금리를 동결할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당분간 금리 역전 상태가 유지된다면, 성장 격차를 봐야 한다. 국내 성장률이 미국 성장률보다 0.5%p 정도 높아지면 한-미 성장 격차 역전이 해소될 수 있다(4개 분기 이동 평균 기준).
블룸버그 컨센서스 기준 하반기 한국 성장률은 2.2~2.3%, 미국 성장률은 1.8~1.9%이다. 이르면 하반기에 성장 측면의 원화 강세 기준은 충족될 수 있다. 다만, 하반기 성장률은 내년 초에 발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내 원화가 강세로 돌아서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원/달러 환율이 1,250원을 하회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원화와 펀더멘 탈의 괴리가 커진 지난 2년 간 원/달러 환율은 8.7% 상승해 평균 1,330원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달러인덱스가 2.5% 오른 것을 감안하면, 달러 강세를 제외한 원화 약세의 환율 기여도는 6.2%p로 추정할 수 있다.
원화 약세 영향이 전부 되돌려지는 수준을 원 /달러 환율 하단으로 본다면, 그 수준은 약 1,250원이다. 달러인덱스가 100을 하회하면 원/달러 하단도 내려갈 수 있겠지만, 단기간에 달러 약세 폭이 가파를 가능성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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