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컬처 게임 시대
한때 서브컬처는 조용히, 조그맣게 존재하는 영역이었다. 피규어를 모으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낙인이 찍히던 시절.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황은 바뀌었다. 애니메이션은 넷플릭스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고, 웹툰 원작의 드라마는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으며, 게임은 이젠 서브컬처의 최전선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게임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이 '덕질'하게 되었다. 이제 서브컬처 게임은 마니아만의 취향이 아니다. 가장 높은 매출, 가장 충성도 높은 유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영역이다.
1편에서 서브컬처 전체의 부상을 조명했다면, 이번 편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서브컬처 게임의 세계를 따라가 보려 한다.
서브컬처 게임 황금기
서브컬처 게임은 애니메이션 풍의 캐릭터와 세계관, 그리고 방대한 스토리텔링을 핵심으로 하는 장르다. 과거에는 이런 게임들이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통용되었고, 일반 게이머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았다.
복잡한 세계관, 낯선 캐릭터, 특이한 진행 방식은 낯설었다. 하지만 웹툰과 애니메이션이 대중화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웹툰을 보던 유저가 같은 IP의 게임을 접하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이가 수집형 RPG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문화적 친숙함이 작용했다. ‘낯설지 않다’는 감정은 콘텐츠 진입에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다. 유저는 더 이상 새롭게 적응할 필요 없이,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서 즐길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OSMU(One Source Multi Use) 구조의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하나의 IP가 다양한 플랫폼에서 유저를 흡수하며, 그 경험이 서로를 보강하는 구조다. 웹툰-애니-게임-굿즈로 이어지는 팬의 여정은, 기업 입장에서 봤을 때 수익성과 팬덤 양쪽을 모두 잡을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
실제로 글로벌 ACGN 시장(애니메이션·만화·게임·소설)에서 게임의 비중은 무려 40%를 차지한다. 만화나 애니메이션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는 서브컬처가 가장 강력하게 변주되고, 수익을 만들어내는 중심축이 이미 게임으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게임은 이제 서브컬처 IP의 종착역이 아니라, 가장 먼저 준비되어야 할 시작점이 되었다.
유명 IP 기반 게임, 망한 이유
웹툰의 성장과 함께 많은 개발사들이 유명 IP에 손을 댔다. <노블레스>, <갓오브하이스쿨>, <외모지상주의>, <마음의소리> 같은 대형 웹툰들이 게임으로 제작되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문제는 단순했다. 콘텐츠가 없었다. 원작만 믿고 만든 게임은 버그 투성이였고, 아트는 조악했으며, 게임성은 기대 이하였다. 원작 팬들이 기대하던 세계를 온전히 구현해내지 못한 것이다.
원작의 인기에 기대어 초반 흥행을 노렸지만, 콘텐츠의 깊이와 완성도가 받쳐주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세계관은 겉핥기였고, 캐릭터의 매력은 텍스트 몇 줄로 소비되었으며, 팬들이 알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뒷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게임들은 빠르게 외면당했고, 팬들은 실망과 함께 게임을 떠났다.
오히려 원작에 대한 실망감까지 이어지며 IP의 가치가 손상되기도 했다. 결국 실패의 이유는 개발력의 부재였다. 유명 IP는 초기 유입을 끌어오는 데엔 강력한 무기지만, 그 이후 유저를 붙잡아둘 콘텐츠가 없다면 빠르게 소모된다. 게다가 IP 라이선스를 사용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적지 않다.
수익의 상당 부분을 IP 홀더와 나눠야 하고, 흥행에 실패하면 브랜드 가치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의 IP 홀더들은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단지 '좋은 IP'를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IP를 어떻게 구현하고, 어떻게 팬심에 닿을 수 있느냐가 진짜 승부처다.
대표적으로 <신의탑>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동일한 IP로 두 개의 게임이 개발되었는데, 엔젤게임즈의 <신의탑: 위대한 여정>은 첫 해 일매출이 4,100만 원에 불과했지만, 넷마블이 개발한 <신의탑: 새로운 세계>는 1억 8천만 원으로 훨씬 높은 수익을 기록했다.
이 차이는 단지 예산이 아니라, ‘팬심을 이해한 기획력’에서 나왔다. 세계관 해석, 캐릭터 간의 관계 설정, 원작에서 느꼈던 감정을 어떻게 게임으로 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흥행 성패를 갈랐던 것이다. 결국 외부 IP는 잘 쓰면 큰 무기지만, 잘못 쓰면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덕심을 이해한 승자들의 전략
<원신>은 서브컬처 게임 산업을 뒤흔든 작품이다. 처음엔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을 표절했다는 논란 속에서 '야숨라이크'로 조롱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원신라이크’라는 장르명까지 만들어낼 만큼 시장을 선도하는 존재가 되었다.
스토리, 액션, 그래픽, 캐릭터 설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캐릭터의 서사’에 집중한 점이 팬들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출시 첫 해에만 1조 5천억 원을 벌어들였고, 2025년 기준으로는 누적 100억 달러에 도달할 것이란 예측도 나왔다. 팬들은 매 시즌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의 서사를 기다리며 세계관의 깊이를 체험했고, 이는 단순한 플레이를 넘은 '정서적 소비'로 이어졌다.
<승리의 여신: 니케>는 3D 모델링 일색의 시장에서 2D 스파인 방식이라는 전통적 기법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캐릭터 디자인과 감성적인 스토리, 탄탄한 건슈팅 시스템을 결합해 글로벌 히트작이 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앱스토어 매출 1위를 기록한 것은 상징적이다.
한국산 서브컬처 게임이 일본을 정복한 것이다. 또한, '니케 듀얼 인카운터' 같은 TCG 파생 콘텐츠와 피규어 프로젝트는 유저들의 애정을 다시 수익으로 환산시키는 구조로 이어졌으며, 단순한 게임이 아닌 하나의 ‘서브컬처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
<블루아카이브>는 학원물이라는 전통적인 일본 장르에 한국 개발사 넥슨게임즈가 도전장을 내밀어 성공한 케이스다. 특히 캐릭터와의 감정적 연결, '스토리 이벤트'의 완성도, 독특한 캐릭터 설정 등으로 팬덤을 구축했다.
업데이트 시점마다 일본 마켓에서 상위권을 기록하며, 이제는 일본 현지 게임처럼 여겨질 정도다. 블루아카이브는 단순히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넘어,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와 개별 서사에 대한 몰입감을 유도하면서 팬들과의 정서적 유대를 쌓아갔다.
<브라운더스트2>는 초기엔 BM에 대한 불만과 낮은 매출로 고전했지만, 특유의 아트 스타일과 콘텐츠 개선으로 역주행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고유의 '책장형 스토리북 구성'은 타 게임과 차별화되는 내러티브 전개 방식으로 유저들에게 신선한 경험을 제공했다.
이처럼 팬의 감정을 얼마나 진지하게 다루느냐가 흥행의 열쇠가 되고 있다. 단순히 과금 구조나 전투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에서 나아가, '왜 이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는가'를 고민한 게임만이 살아남는 시대다.
서브컬처 게임, 플랫폼까지 접수
서브컬처 게임은 모바일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이제는 플랫폼 자체를 확장하고 있다. 2010년대는 <소녀전선>, <벽람항로>, <프린세스 커넥트>처럼 2D 기반의 정적인 수집형 게임들이 주류였다.
캐릭터 대화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 중심의 진행, 턴제 전투, SD 캐릭터 모델링 등은 비용 효율성과 유저 친화성을 동시에 고려한 결과였다. 특히 <소녀전선>은 중국산 서브컬처 게임이 한국과 일본에서도 흥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장르 전체의 외연을 넓혔다.
그러나 <원신>의 등장은 이 판을 갈아엎었다. 3D 오픈월드 기반의 초대형 콘텐츠, 매력적인 지역별 스토리라인, 캐릭터 중심 서사와 높은 퀄리티의 그래픽. 모든 면에서 ‘콘솔급 게임’을 모바일로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이환>, <무한대>, <망월> 등 어반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신작들이 등장하며 서브컬처 게임의 배경도 현실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이환>은 자동차 운전, 경영, 건축까지 가능한 자유도 높은 콘텐츠로 '서브컬처 GTA'라 불릴 만큼 기대를 모으고 있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은 현실성과 디테일이 요구되기에 개발 난도가 높지만, 성공 시 IP 확장의 폭이 훨씬 넓어지는 장점도 존재한다.
플랫폼 확장도 눈에 띈다. 모바일만이 아니라 PC, 콘솔까지 지원하는 크로스 플랫폼 게임들이 증가하고 있다. 스팀 유저와 콘솔 유저를 동시에 노리며, 스팀덱과 같은 UMPC를 활용한 플레이도 일반화되고 있다.
<스텔라블레이드>나 , <에테리아> 같은 게임은 콘솔 전용으로 출시되어 고퀄리티 액션과 서브컬처 아트를 동시에 노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고성능 하드웨어를 기반으로 하는 만큼 그래픽 품질과 물리 효과에서 압도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며, 서브컬처 게임이 더 이상 '가벼운 모바일 게임'에 머무르지 않음을 증명해낸다.
계속 나오는 이유 : 덕후는 돈을 잘쓴다
서브컬처 게임 유저들은 유독 지갑이 열려 있다. 일반 퍼즐, 슬롯, 전략, 슈팅 장르의 ARPDAU(유저 1인당 하루 평균 매출)가 50~500원 수준이라면, 서브컬처 게임은 2,000~6,000원에 달한다.
단순히 유저 수가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유저들의 '애정 깊은 소비'가 큰 매출을 만든다. 이들은 단순히 한 번 결제하고 끝내지 않는다. 이벤트, 굿즈, 한정 캐릭터 등장 시마다 반복해서 소비하며,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곧 과금의 논리로 이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유저의 연령이다. 일반 캐주얼 게임이 30~50대 중심이라면, 서브컬처 게임은 70~80%가 35세 미만이다. <명조>의 경우엔 무려 83.5%가 35세 이하다. 이 젊은 세대는 앞으로 더 큰 소비력을 지닌 세대로 성장한다. 지금도 높은 ARPDAU를 보이는 이들이 앞으로 10~20년 동안 시장의 핵심이 된다면, 서브컬처 게임의 미래는 더욱 밝다.
이러한 충성도와 소비력은 게임 외 수익 구조에서도 빛을 발한다. 한정 굿즈, 피규어, 사운드트랙, 팬북 등 다양한 형태의 2차 소비가 뒤따르며, 이는 브랜드 충성도와 결합되어 독립적 경제 생태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게임 마케팅이 아닌, 팬덤 경제의 실체다. 특히 ‘이벤트 굿즈 + 한정판 출시 + 재입고 없음’이라는 3요소는 팬들의 FOMO(놓치고 싶지 않은 심리)를 자극하여 충동구매를 유도하고, 이는 굿즈뿐 아니라 게임 내 과금으로도 연결된다.
서브컬처 게임, 진짜 승자는 누가 될까
서브컬처 게임 시장에서 진짜 승자는 누구일까? 단순히 유명한 IP를 가진 기업이 아니다. 그 IP를 어떻게 구현하느냐, 팬의 감정을 어떻게 연결하느냐, 세계관을 어떻게 확장하느냐가 중요하다. 유저는 이제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감정의 흐름에 반응하고, 세계관의 연속성을 요구하며, 스토리의 품질과 감정선을 기준으로 지갑을 연다.
넷마블은 <일곱개의대죄>, <제2의 나라>, <신의탑: 새로운세계>, <나혼자만레벨업> 등 굵직한 외부 IP 게임을 다수 제작했다. 그 이면엔 IP 홀더들이 넷마블의 개발력을 신뢰한다는 점이 있다. 검수도 많고 제약도 많은 외부 IP 개발에서 넷마블이 지속적으로 계약을 따내고 있다는 건, ‘신뢰할 수 있는 덕심 번역기’로서의 역할을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팬들과의 소통 역시 중요한 무기다. 서브컬처 팬들은 예민하고 열정적이다.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빠르게 등을 돌릴 수 있지만, 반대로 진심을 전할 수 있다면 평생의 지지자로 남는다.
진짜 승자는 팬과 함께 성장하고, 그들의 감정을 존중하는 개발사일 것이다. 진심과 기술, 그리고 감정에 대한 예의. 이 세 가지가 모두 갖춰진 곳만이, 앞으로의 서브컬처 게임 시장에서 중심이 될 수 있다.
서브컬처 게임, 덕질이 만든 기적
서브컬처 게임은 단순한 장르를 넘어선 하나의 세계다. 게임을 통해 우리는 더는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가 되었다. 캐릭터의 감정선에 공감하고, 세계관의 설정에 몰입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그 세계를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어쩌면 현실보다 더 진실된 감정을 경험한다.
이제 덕질은 조용히 숨겨야 할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이고, 연결이며, 창조다. 수많은 유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좋아하는 세계를 응원하고,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며, 또 다른 팬들과 함께 그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서브컬처 게임은 더 이상 ‘특정 취향’의 소수가 즐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세대와 전 세계를 아우르는 가장 강력한 문화 소비의 중심축이 되었다.
앞으로의 게임은 기술로만 경쟁하지 않는다. 감정, 서사, 팬심,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읽고 구현해내는 게임이 진정한 승자가 될 것이다. 진짜 세계는 모니터 속에만 있지 않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기억과 애정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힘, 그 애정을 다시 움직이는 힘이 바로 ‘서브컬처 게임’에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사랑한다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고. 그리고 그 세계는, 지금도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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