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키17>을 보고 : 소모품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충분한 우리
어떤 영화들은 화려한 장르적 색채를 띠고 있지만, 그 본질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제와 죽음,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질문,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그리고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생존 서사는 결국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찾고, 깊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로 수렴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나’로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수많은 비유와 은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미키라는 한 개인의 성장과 변화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스스로를 ‘소모품’이라 여기지만, 나샤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미키 18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마주하며,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영화는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단순한 기능이나 역할로 정의되지 않으며, 사랑하고 사랑받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고 말입니다.

영화 <미키17> 줄거리 요약
2054년, 인류는 지구를 떠나 얼음 행성 니플하임에 정착을 시도합니다. 생존이 어려운 이곳에서 탐사대는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할 ‘익스펜더블(Expendable)’, 즉 소모품 같은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미키 반스는 그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더라도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나고, 기억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시스템은 그를 필요할 때마다 다시 만들어내며, 불필요해지면 사라지는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이전의 미키는 소멸되어야 하지만, 미키 17은 여전히 살아남습니다. 문제는 시스템이 이미 미키 18을 만들어버렸다는 점입니다.
규칙에 따르면 하나의 미키만 존재해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두 명의 미키가 공존하게 됩니다. 시스템은 두 존재를 동시에 인정할 수 없으며, 결국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는 냉혹한 논리가 작동합니다.
미키는 점점 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대체 가능한 존재일까요? 아니면 그 자신만의 의미를 지닌 독립적인 존재일까요? 그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랑과 관계,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온전한 '나'로 존재한다는 것
미키는 처음부터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지구에 있을 때도 그는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몰랐습니다. 친구가 하자고 하는 마카롱 사업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뛰어들었고, 무심코 자신의 명의로 사채를 쓰며, 익스펜더블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때조차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늘 떠밀려가는 것이었고, 시스템이 정해놓은 대로 움직이는 존재였습니다. 그에게 삶은 선택의 연속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저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니플하임에서 그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크리퍼에게 잡혀갔다가 살아남았을 때, 그는 처음으로 ‘왜 나를 살려줬느냐’고 화를 냅니다. 나는 불량 고기가 아니라고, 나는 쉽게 버려질 존재가 아니라고 외칩니다.
이 장면은 미키17의 생존 본능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순간 미키는 자신이 그동안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해왔는지 깨닫습니다. 그는 익스펜더블이라는 역할을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키 18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습니다. “어차피 죽으면 다시 태어나니까 상관없는데, 왜 그렇게 죽지 않으려 하는 거야?”라는 미키 18의 질문에 미키 17은 말합니다. “이전에는 다시 태어나도 내가 나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내가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건 내가 아닌 것 같아.” 이 순간,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시스템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 이후 그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만을 목표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결국, 사랑과 관계 속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나샤는 미키가 어떤 존재인지, 몇 번째 미키인지에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미키 18은 미키 17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어.” 이 말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던 미키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미키는 사랑을 배우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며, 결국에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진정한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그저 생물학적으로 생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키가 찾아야 했던 진짜 ‘나’였고 진짜 '삶'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 그리고 무조건적인 인정
미키에 대한 나샤의 사랑은 처음부터 진실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조차도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미키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였기에, 그녀의 사랑 또한 진지한 감정이 아닐 것이라 우리 관객들조차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편견이었습니다. 시스템이 규정하는 가치는 미키를 소모품으로 취급했지만, 나샤는 그 기준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미키는 매번 프린트되는,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는 복제 인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사랑할 이유가 충분한 존재였습니다.
미키 17과 미키 18이 동시에 존재할 때도, 나샤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 하나를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나샤의 사랑 방식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은 일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논리가 미키를 소모품으로 간주할 때에도, 나샤는 오직 그를 한 명의 인간으로 사랑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영화 초반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나샤가 미키에게 보여주는 감정은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필요에 의한 접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관객조차도 미키를 사랑하는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사랑이 계산적인 것이 아니라 본능적이며 절대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다른 인물들이 미키를 함부로 대할 때도, 나샤만은 그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사랑의 본질이었습니다.
특히 실험실에서 미키가 죽어가던 순간은 나샤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진실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우주선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을 때, 오직 나샤만이 방호복을 입고 미키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실험체도, 복제 인간도 아닌 그저 미키였습니다. 그녀는 그를 안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며, 그 존재를 끝까지 지켜주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이었고, 이 영화의 주제가 사랑이라고 느껴질 만큼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이 사랑은 로맨스가 아닙니다. 나샤의 사랑은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세상의 기준이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 그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도 위대한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됩니다. 미키가 몇 번째 복제체이든, 어떤 신체를 가지고 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나샤는 그가 ‘미키’이기 때문에 사랑했고, 그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미키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나샤를 통해 자신이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소모품으로 대할 때, 나샤만은 그를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인정했습니다.
그것은 차 한잔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위로가 아니라, 미키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결국 나샤의 사랑은 미키가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도록 도운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조건을 따지고, 논리를 내세우며 사랑을 정의하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이유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미키가 어떤 존재인지, 몇 번째 복제인지가 아니라,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사랑. 그것이 나샤가 보여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따뜻한 메시지가 아닐까요?

진정으로 위로받아야할 대상
우리는 누구에게서 가장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 가족, 친구 등 많은 사람이 떠오릅니다. 미키 17은 이 질문에 대한 특별한 대답을 제시합니다.
영화 속 미키는 평생을 따라다닌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깊이 간직한 상처는 어린 시절 가족을 잃은 자동차 사고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고의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고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미키는 마샬이 제시한 버튼 게임을 통해 이 사고의 기억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무의식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탓하고 있었고, 죄책감은 그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미키 18이 그에게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자동차 결함 때문이었어."
이 말은 타인에게 듣는 위로와는 다른 차원의 위로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이 아니라, 미키 17과 완전히 동일한 기억과 사고 과정을 가진 또 다른 자신이 한 말이었습니다.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 건네는 위로였기에, 그 말은 어떤 말보다도 깊숙이 가 닿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진심 어린 위로조차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말이든 결국 타인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미키 18은 말 그대로 ‘미키’였고, 그의 위로는 미키 17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진정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위로는 자신이 정말 사랑했던 나샤조차도 할 수 없는 위로입니다. 나샤도 결국 타인이니까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성장합니다. 평생을 따라다녔던 죄책감의 상징이었던 빨간 버튼, 그 버튼을 누르는 것이 가족을 죽게 한 원인이었기에 그는 그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다릅니다.
그 버튼을 스스로 누름으로써,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습니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단순히 그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키가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죄책감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버튼을 누르며 자신을 복제하는 휴먼 프린터기를 폭발시키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희미하게 만들었던 시스템을 끝내고, 온전한 ‘나’로 존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미키 17과 미키 18이 하나의 인물로 합쳐지듯, 영화의 크레딧에서도 두 개의 이름이 사라지고 최종적으로 ‘미키 반스’라는 이름 하나만이 남습니다.
이러한 결말은 미키가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되찾았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그는 시스템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되고, 자신조차 스스로를 하나의 복제된 존재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나샤의 사랑을 통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들은 진정한 위로를 통해 그는 깨닫습니다. 그는 ‘미키 17’도, ‘미키 18’도 아닌 ‘미키 반스’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이 영화가 SF기반의 복제 인간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지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 그리고 성장과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스스로를 가장 가혹하게 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장은 자신을 용서하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미키 17이 미키 18을 통해 얻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자신을 아끼고, 위로하고, 죄책감을 치유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입니다. 외부의 인정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나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키가 진정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며,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깊은 메시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할 차례
미키 17은 인간이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정의하며,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복제와 소모, 인간의 가치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에게 '우리는 소중한 존재'라는 메세지를 명확히 전달합니다.
영화 속 미키는 자신을 소모품이라 여겼습니다. 필요할 때 쓰이고, 쓸모가 다하면 버려지는 존재. 시스템이 그를 그렇게 취급했고, 어느새 그는 스스로조차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누구의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는 결정된다는 것을. 미키 17은 이 진실을 아주 감성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방식으로 풀어냅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직접 경험하게 만듭니다. 나샤는 미키에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조건이 없었고, 미키가 몇 번째 복제체인지조차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미키 18은 미키 17에게 세상이 아무리 그를 소모품이라 규정하더라도, 그 자신만은 자기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한마디는 그가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죄책감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미키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내게 건네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 속에서 자신을 평가하고 깎아내립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더 많은 가치를 증명해야 하며, 더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미키 반스는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한 존재입니다. 어떤 역할을 하든, 무엇을 이루든, 그 이전에 당신은 그 자체로 소중합니다. 미키가 깨달음을 얻고 성장한 것처럼,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도 따뜻한 확신을 전해 줍니다.
이 작품의 결말은 단순한 SF적 설정을 넘어서, 우리가 언젠가 마주하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가장 따뜻한 대답이 됩니다.
영화는 정체성을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크레딧에서 미키 17과 미키 18의 이름이 사라지고, 단 하나의 이름, 미키 반스만 남는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그는 더 이상 복제된 존재도, 대체 가능한 소모품도 아닙니다. 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우리 모두에게 향합니다. 우리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제 당신이 당신 자신을 사랑할 차례입니다. 이 영화는 당신이 그 여정을 걸어갈 때, 함께할 것이라 말합니다. 미키 17은 그렇게 조용하지만 강한 위로를 남깁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키 반스는 해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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